아름다운 날의 저편
흩어졌던 사방이 어깨를 부딪치며 도란도란 둘러앉는 날은
영락없이 비가 온다. 그런 날이면 허름한 서민 아파트 창가에
기대 바라보는 세상은 더없이 아늑하다.
내 삶을 뒤돌아보면 내가 버린 날들의 빈자리마다 외치는 소리
때문에 마치 이중 삼중으로 덧댄 방범 창살로도 모자라 자꾸만
두리번거려지는 어두운 밤처럼 오래도록 잠을 설친다.
현자!
시각 장애가 있던 그녀는 끓는 물에 잘못 데쳐낸 콩나물처럼
흐믈거리는 정신지체까지 겹친 중복 장애인이었다. 어느 종교
단체가 운영하는 자그마한 공동체에 몸 붙여 살았다. 갓 넘긴
스무 살 나이가 어디로 가버렸는지 기미와 주근깨투성이의
얼굴은 구부정한 허리로 항상 처연한 표정이었다.
거기다 극심한 대인 공포증과 언어 장애로 시달렸는데 손가락 두 개가
크게 비틀어진 것도 그녀를 버린 포악한 아버지 때문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현자는 들릴 듯 말 듯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공동체 식구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면 늘 즐겁고 행복한 추억만 꺼냈다. 반 시간도 채
되지 않아 둘러앉은 식구들을 몽땅 깊은 꿈나라로 몰고 가버리는
두서없는 그의 이야기 중심엔 늘 언니가 있었다.
내가 현자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의 유일한 혈육인 봉자 씨는
동생 현자와 비슷한 장애를 가졌지만 더 극심한 고통을 살았다.
남자인 내 앞에서도 속옷 하나만 걸친 채 부끄러운 줄 몰랐으며
화장실 일을 보고 그대로 나오는 바람에 발목까지 내려온 속옷을
입혀 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동생 현자가
진종일 붙어 다니며 시시콜콜 참견하고 잔소리를 해댔다.
그렇지만 현자는 마치 부자가 소중한 사람 앞에 꼭꼭 숨겨 놓은
금고에서 귀중한 물건을 조심스럽게 꺼내듯 고통스럽고 힘겨웠던
지난날을 아름답게 꾸며낼 기회만 되면 언제나 언니를 주인공으로
삼았다. 또한 가끔씩 찾아오는 방문객들에겐 뱃심도 좋게 이렇게
말하곤 하였다.
"저는요 여기서 오래 살지 않을 거예요. 큰 집을 사면
울 언니랑 같이 살 거예요"
정상적인 생각을 하지 못한다고 여겼던 그녀도 어렴풋하게나마
어린애처럼 나대는 언니에게서 숨기고 싶은 여자의 수치심을
느꼈던 것일까?
때때로 뜻이 맞지 않으면 대판 싸움이 붙고 풀리지 않는 화를 주체할
수가 없어 무엇이든 손에 잡히는 대로 마구 집어 던져야 직성이
풀리는 상대인 언니. 현자에게 있어서 그런 언니는 자신이 챙겨야
할 힘겨운 짐이었지만 그 누구에게도 하지 못한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눌 유일한 피붙이며 친구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녀의 하루 마지막
기도는 항상 언니의 슬픔과 함께 부풀었고 언니의 웃음을 따라 야무지게
영글어 갔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며칠째 계속되는 두통과 메스꺼운 증세로 앓아누운 현자에게
뜻하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 처음에는 발병 원인을 몰라 어쩔 줄
모르던 공동체 원장님이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산부인과에 데려가
초음파 진단까지 받게 했지만 헛일이었다. 음식조차 입에 대지 못하는
현자의 고통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결국 종합병원의 내과와 신경정신과를 거쳐 안과에 가서야 비로소
그 모든 소란의 전말이 드러났다. 하늘과 땅이 뒤집히는 그 헛구역질의
진범이 마침내 얼굴을 드러낸 것이다. 종합 진단 결과를 보러 가는
날이었다.
현자는 그간의 고통으로 부르튼 입술에 새빨간 립스틱도 바르고 헝클어진
머리를 단정하게 묶어 예쁜 핀까지 꽂았다. 제법 숙녀다운 멋을 낸 것이다.
그러나 푸른색 티셔츠 위에 걸쳐 입은 가디건은 할머니들이나 입을 법한
회색빛 털 스웨터였다. 여름이 코앞인데...
"선생님 저 어때요? 이 옷 이쁘죠?”
내 손을 잡고 대문을 나서며 부끄러운 듯 현자는 얼굴을 붉혔다.
"그럼 예쁘고 말고 오늘따라 정말 멋지다야!”
나는 그녀의 가녀린 어깨를 조심스럽게 토닥거렸다. 지금도 그렇지만
예전의 종합병원은 그 어디를 가나 북새통이었다. 기다란 전깃줄에
쪼르르 둘러앉은 참새들 마냥 나무 의자에 다닥다닥 붙어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맨 끝에 궁둥이를 붙인 현자는 그야말로 참한
새색시였다.
검붉은 오월 장미를 달달 볶아치는 한낮 무더위가 좁다란 병원 복도를
후끈 달굴 때마다 하얀 손수건을 꺼내 쑤석쑤석 목덜미를 닦는 모습은
영락없는 할머니이기도 했고...
괜한 불안감으로 화장실을 뻔질나게 들락거리던 나는 담담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그녀의 모습에서 내심 적지 않은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담배 몇 개비 멋지게 태우는 여유를 부렸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나의
찌질한 폼 세는 얄팍한 차트 몇 장 훌떡훌떡 넘기던 의사 선생의 지극히
사무적이고 건조한 말투 앞에서 훅 날아가 버렸다.
"뭐 다 아시겠지만... 녹내장으로 실명한 경우 통증이 재발하면 수술
외엔 딴 방법이 없어요. 이 환자의 경우 원인불명의 안압 때문에
통증이 발생한 겁니다. 이대로 방치하면 합병증도 심해서 환자의
상태는 점점 더 어려워질 거예요. 고통은 말할 것도 없고. 당장
입원시키세요.”
“혹시...수술?”
“네 적출해야 합니다.”
무뚝뚝한 의사가 책상 위로 픽! 볼펜을 던지는 것과 현자가 와락 울음을
터뜨린 건 거의 동시였다. 의사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한 채 엉거주춤
서 있던 나는 순간 당황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그녀의 울음은 이내
통곡으로 변했다.
의사의 짜증 섞인 표정에 놀란 간호사가 재빨리 어깨를 감싸며 달랬지만
현자는 한참을 막무가내였다. 간신히 진정되어 진료실을 빠져나올 때
나는 그야말로 시뻘건 홍당무였다. 울컥울컥 화도 치밀었다. 복잡한 상념들이
가슴을 터트릴 듯 방망이질 쳤던 것이다.
그러나 시급한 일은 입원 수속이었다. 동분서주하다 겨우 수속을
끝내고 막 돌아왔을 때 옆으로 살며시 다가와 손을 꼭 잡는 그녀의
사근사근한 목소리가 나를 다시 한번 무너지게 했다. 불같이 닳아오른
내 가슴 복판에 바다만한 아픔을 풍덩 던져 넣은 것이다.
“선생님 제가 병원에 입원하면 울 언니 누가 머리 빗겨줘요? 양 말도
신겨줘야 하는데...”
현자를 입원시키고 돌아오던 길의 그 뿌연 하늘 빛은 왜 그렇게 낯설고
아득하기만 하던지...... 그렇게 달포를 보내고 퇴원한 현자는 그동안
우리가 의아하게 여기고 있던 한 가지 습관을 버렸다. 밤이 되어도 다시는
형광등을 켜지 않은 것이다.
나는 그 날 이후 현자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전해 들은 언니가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는지 이야기하지 못했다. 그날 밤 저녁 식사 때 밥 수저를 내던진
봉자씨가 방구석으로 돌아앉아 하염없이 흐느꼈고 그 눈물을 닦아주며 식구들
모두 함께 울었다고.
그러나 이제 그 이야기를 꺼낼 때가 된 것 같다. 봉자 씨가 얼마 전
영원한 어둠 저편으로 훌훌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삶이
무거울수록 떠난 사람의 빈자리는 큰 법이다.
자신의 비좁은 삶을 구르며 소리소리 지르던 마지막 잎새를 떠나보내고
가슴 저미는 추억만 끌어안은 채 오늘도 어느 낯선 시간을 부대끼고 있을
현자에게 자신도 모르고 있던 언니의 숨겨진 사랑이 다소나마 위로가
되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얼어붙었던 대지를 적시는 저 촉촉한 봄비처럼 안으로만 쌓여갔을
그녀의 절망이 다시 한번 새로운 삶의 희망으로 푸르게 피어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