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들의 사랑방

후레쉬-----신용목

조각별 2018. 10. 7. 18:02

 

 

 

동그라미는 왼쪽으로 태어납니까 
오른쪽으로 태어납니까 
왼쪽으로 태어난 동그라미의 고향은  
오른쪽입니까  
어디서부터 오른쪽은 시작됩니까 
동그라미를 그리는 자는 
동그라미의 부모입니까  

내가 그린 동그라미는 몇 개입니까 
나는 그들에게 죄인입니까 
왼쪽으로 걸어갔는데 왜 오른쪽에  
도착합니까 
왜 자꾸 동그라미를 그립니까 
동그랗습니까 동그랗습니까 

어둠을 뒤쫓던 후레시 불빛이 
내 얼굴에  쏟아졌을 때 
나는 유일한 동그라미 안에 갇혀 있었다 
동그라미 안에만 비가 내리고 
우리는 언제나  
우리가 가진 가장 소중한 것을 착취당하지 

너는 여자였고 나는 가난했어 
무엇보다 우린 젊어서 온통 늙어가지 
그러나 어둠은 한 번도 잡히지 않았다  
후레시를 켤 때마다  
보란 듯이 불빛 그 바깥에 가 있었네 

동그라미 안에만 비가 내리고 
나는 간신히 외치기 시작했어 
비 내리는 밤이 있다는 것은  
아직 우리의 슬픔이 젊기 때문이다 

다음날부터 태양은  
구정물 통에 담긴 접시처럼 
유일한 하늘에  떠 있었다 

다음날부터 나는 
깨뜨릴 수 있는 동그라미와  
깨뜨릴 수 없는 동그라미에 대해 
생각했지만 우리가 만났던 밤은 
아직 젊었고 어떤 비도 슬픔을 씻기진 못하고 

너는 여자였고 나는 가난했지 
동그라미 안으로 쓰윽 들어온 손이 
내 턱을 치켜올렸을 때 
내 얼굴은 이미 깨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