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틀릴 수 있다는 것
우리는 곧잘 자신이 틀릴 수 있다고 말한다. 실수나 잘못을
인정하는 게 진솔한 삶을 추구하는 생의 중요한 가치라고
여기는 탓이다. 그것이 끔찍한 오류일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다. 언제나 신지식과 새로운 개념의 논리로 스스로를 세탁,
변화시켜 온 전통적 사고방식의 익숙한 피드백이 무의식적
경험의 감각에 긍정적 신호로 작용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잘것없는
정보 분열과 충돌에 지나지 않는 자기 부정의 갈등적 표출일 뿐인
신파적 고백이 너와 나의 관계 중심을 절대 놓치지 않는 이유리라.
끊임없는 성장, 성숙의 단계에서 무언가로 되거나 거부되는 우리가
그저 닮음과 흉내의 반복들을 언어 치환으로 낯설게 만들며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현실에 불과하다는 얘기다. 왜냐하면 현재는 복제된
과거의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는 것이며 처음부터 빗나간 지금 여기인
탓이다. 삼척동자도 틀린 것 속의 틀림은 전적으로 틀린 것이 아니란 걸 안다.
만약 너와 내가 이미 틀려있지 않았다면 아마도 오늘날 우리들의
현실은 180도 달랐을 것이다. 둘도 없는 이 아름다운 푸른 지구별이
거대 조각보처럼 너덜너덜 찢겨지지 않았을 것이란 뜻이다. 걸핏하면
죽기 살기로 싸우는 국가, 종교, 전통으로 흩어져 매일매일 지글지글
타는 숯불구이처럼 서로의 생활 공간을 잘라먹으며 으르렁 거리는
삶의 형태로 존재하지 않았을것이란 의미다.
대답할 수 있겠는가? 누구든 자신이 정녕 무엇을 하고 있는지?
관계의 본질은 무엇이며 마음과 현실의 괴리는 수 천 년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왜 메꾸어지지 않는지. 무엇이 각자를 서로 다르게 하는지
말이다. 아무도 가르쳐 줄 수 없고 저절로 알 수 있는 길도 막혀버린
오로지 진리가 열어주지 않으면 결코 알 수 없는 자기 비밀의 봉인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터무니없이
이율배반적이고 가혹하리만치 무자비한 생존 환경을 버텨내기 위해
어쩌면 우리가 그 눈먼 손짓으로 가장 쉽게 선택할 수 있는 방어
수단은 하나일 것이다. 고통의 진정한 의미보다 변명과 합리화의
잔꾀가 부리는 도피다. 종종 자신이 틀릴 수 있다는 언어의 강렬한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는 까닭이리라.
달리 말하자면 자기 진실을 정확하게 통찰하지 못한 어둠 속에서의
선악적 논리는 그것이 아무리 절실하고 숭고할지라도 결국 자기 기만적
행위로 그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이제껏 눈만 뜨면 참혹한 사건 사고로
엉망인 문명사가 면면이 움켜쥔 현란한 꽃송이의 진실은 다름 아닌 우리가
매일 같이 평범하게 걸어가는 저마다의 발걸음으로 되살아나는 과거의
숨 가쁜 반복일 뿐이란 얘기다.
시대마다 유행하는 일반적인 사상 철학 종교의 성찰은 우리 모두를 자기
무지라는 혼의 폭력으로부터 한 발짝도 벗어날 수 없게 한다는 말이다.
단지, 있는 그대로의 현재를 지속 강화 시킬 뿐인 주어진 존재로서의
발버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 그렇다면 진정한 반성은 무엇일까?
모름지기 그것은 틀리거나 틀리지 않았다고 분별이 아니라 그런
기계적인자기 인식 행위가 교묘하게 저지르는 자기 무지에 대한
은폐성 술수를 간파하는 통찰일 것이다. 낡고 낡은 사고방식의 줄기찬
가짜 역할을 통렬하게 패대기치는 참된 스스로성의 창발이란 얘기다.
오직, 그것만이 벗어버리지 않는 한 그 어떤 모양과 방향도 우리 자신에게
잔인한 폭력일 수밖에 없는 오래된 인간의 발자국을 밟지 않는 유일한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