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벽에 쓴 낙서

모퉁이 바람

조각별 2023. 6. 5. 09:32

 

 

 

감자들이 포동포동 살찌는 계절이다. 어느 곳에선 벌써 수확의 기쁨이 전해져 온다.

아무래도 감자 캐는 즐거움은 다른 뿌리채소들이 결코 따라올 수 없는 그 특유의

손맛 때문일 것이다.

 

우리 집은 밭이 넉넉하지 못했다. 언제나 보리, 마늘 등 다른 작물이 심어지고 남은

자투리땅에 셋방 살이 하듯 감자밭을 일구었다. 그래도 짧고 굵은 고랑마다 튼실하게

자란 줄기가 넘쳐나는 야무진 수확 철이 되면 우리 식구들은 너도나도 신명이 났다.

주렁주렁 딸려 나오는 알알에 덩실덩실 흥겨웠다. 커다란 아버지 지게에 얹힌 뽀얀

녀석들이 우루루 우루루 마루 밑으로 기어들면 우리들의 입술은 그야말로 활짝 핀

접시꽃처럼 날마다 하하 호호였다.

 

내 어릴 적 우리 집 마루는 참 높았다. 주먹만 한 나무 공이가 뻥 뚫려 자칫 발목이라도

빠지는 날이면 며칠을 절뚝거려야 하는 사고뭉치였다. 거기다 갓난 동생이 하루가

멀다 하고 실례를 하는 통에 얼금얼금 들뜬 판자 틈새로 노랗게 흘러든 건더기를

나뭇가지로 자주 긁어내야 하는 골칫거리이기도 했다. 그 넌덜머리 나는 콤콤한 마루 끝에

걸터앉아 동생들과 으르렁거리며 먹던 파근파근한 감자 맛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양손에 움켜쥐고 굵은 소금 꾹꾹 찍어 먹던 그 포실한 속살들은 고작 한 달을 넘기지

못한 채 스르르 자취를 감췄지만... 그러다 어느 날 문득 가난한 살림살이 된장국 멀건

밥상 구석에 짠하고 등장하던 못생긴 알감자조림은 우리를 또 한 번 놀라게 했다.

그때 알았다. 감자 철의 백미는 뭐니 뭐니 해도 단연 짭쪼름하게 졸인 알감자 반찬이라는 걸...

찬물에 말은 뻐글뻐글한 보리밥 한 공기쯤 금세 뚝딱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도 입안에 침을 고이게 하는 옛 추억 속에 금싸라기처럼 박힌 우리들의 단골

메뉴는 따로 있다. 바로 뒷마당 장독대에서 곰삭던 고소하고 맛깔스런 입맛들이다. 이제는

손주 재롱을 보며 사는 나이가 되어버린 형제들이 가끔 찾아와 티격태격하는 잡초 무성한

뒤란 장독대. 그 당시 속 썩이던 툇마루와 달리 우리 형제들에겐 제일 만만하고 위험천만한

신세계였다.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눈높이로 밤새 얼어붙은 고드름 줄기가 토방까지 쑥 내려온 겨울철에는

종종 식혜와 조청 혹은 구멍 난 알밤들이 어딘가 놓여 있는 옹기그릇에 반드시 숨겨져 있었다.

재수가 좋은 날이면 명절에 남은 강정이며 약과를 얼금얼금 덮어놓은 무말랭이 밑에서 오지게

훔쳐 먹을 수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한 여름에는 이른 아침 재빨리 물어뜯은 떫은 단감들이

쥐도 새도 모르게 숨어드는 빨간 봉선화 옆 크고 작은 단지들마다 쫄장기, 딘핑이, 고개미 등

온갖 젓갈들이 구수하게 익어갔다.

 

물론 비스듬하게 내려앉은 토담에 기댄 채 곰삭는 퀴퀴한 된장 속에선 쉬파리 구더기들도

우글우글 왕성하게 자라났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장독대는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누이들의

성난 먹성을 해결해 주는 풍성한 식탁으로 사시사철 손색이 없었다. 그런 뒷마당의 은밀한

비밀을 혼자서 너무 많이 알고 있었던 게 탈이었을까. 해마다 가을이 되면 핏발선 바지랑대

등쌀로 너덜너덜해지는 단감나무 한 뼘 그늘 아래서도 부지불식간 눈부신 마술이 펼쳐지기도 했다.

 

여름부터 초가을까지 부엌을 뛰쳐나온 작은 부뚜막이 그 아래에 터를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들기름 냄새 격한 검은 가마솥 뚜껑 위로 울긋불긋 파전이 나풀거리고, 큰 양은솥 찰랑찰랑

노란 콩 까만 콩들이 소나기처럼 볶아지는 날이면 우리 집안 인심은 바닥을 드러냈다.

 

지금처럼 아무 때나 집을 나서면 먹거리 가게가 사방에 널려 있지 않던 그 시절. 날 궂을 때

맨 입이 굴풋한 어른들과 시도 때도 없이 칭얼거리는 어린 자식들의 간사스런 입맛을 해결하는 건

바로 그곳이었다. 장독대 모서리 한편에 납작한 돌 몇 개 삼 발처럼 살짝 포개놓은 어머니의 솜씨

좋은 간이 부뚜막은 그야말로 요술램프였다. 밥숟갈 놓자마자 방귀 서너 방이면 눈 녹듯 사라져버리는

참 야속한 삼시 세끼의 허기를 달래주는 최고의 슈퍼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전쟁치르듯 생존의 허덕거림을 버텨야 했던 빡빡한 세월의 마디마디를 터진 굳은살처럼

살아간 내 어머니가 낡은 살림살이의 쓰디 쓴 먹거리들과 씨름하던 좁다란 뜨락. 불현듯 흠뻑 젖은

등줄기를 식히며 망연히 서 있던 그 모퉁이 바람 속에 지금 내가 서 있다. 너무도 모질고 외로웠을

두어 줌 바람결은 오늘도 오래된 기억을 밟으며 고단한 삶의 한 페이지를 넘어가는 아들 가슴속으로

뜨겁게 후벼든다. 그때도 저렇듯 시리도록 파란 하늘이었을 것이다. 온 생애를 질끈 동여맸던 가냘픈

허리끈 잠시 풀어놓고 무심하게 둥둥 떠가는 먼 흰 구름을 바라보며 어머니는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