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는 넓다.
별과 별 사이의 간격은 우리의 오감이 느끼는 거리 감각을 훨씬 뛰어넘는다.
차원이 다른 공간인 것이다. 그래서 그 거리를 인식 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우리는 지구 지표면을 계산하는 미터법을 쓰지 않고 공간성 운동인 빛의 속도를
측정 단위로 쓴다.
일명 광년이다.
일 광년은 빛이 초속 30만 킬로미터로 1년 동안 움직이는 거리를
나타낸다고 한다. 그런 빛의 속도로 날아가서 만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항성이 태양을 제외하고는 4년 하고도 3개월을 더 달려가야 닿을 수 있는
알파 켄타우루스다.
멀다는 말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되는 거리로서 이렇듯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계산법으로 산출된 우리 은하계의 길이는 자그마치 10만 광년이라고 한다.
그 크기가 참으로 엄청난 것이라 아니할 수 없겠다.
이것이 과학일 것이다.
우리가 늘 바라보는 밤하늘의 숱한 빛 무리를 비롯하여 일상 주변으로 흔하게
펼쳐진 물질. 물리 현상을 관찰, 연구해서 우리 눈엔 그저 반짝거리는 빛깔의
검은 배경에 지나지 않는 별과 별 사 이에 숨겨진 틈새로서의 어둠을 놀라운 입체적
공간성으로 발견하는 것.
그리하여 하늘이란 평면적 상황을 무수한 곡면과 간격들이 다차원의 중첩을
구성하며 무서운 속도와 운동의 역학 관계로 움직이는 우주라는 무한 공간으로
확장시키는 것.
동시에 우리 의식의 지평까지도 변화시키는 등등... 때문에 어떤 이는
이런 과학의 눈부신 발전으로 정립된 새롭고도 심원한 공간 세계의 이해를 통해
붓다의 공 개념을 설명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1,300도 이상의 고온에서 밀도 있게 구워낸 아름다운 형태의 도자기를
원자와 미립자의 차원으로 해체시키면 완벽한 허공이라는 개념 따위다. 물질의 최소
단위에 속하는 입자 세계에선 안·이·비·설·신으로 분명히 존재하는 도자기가 감쪽같이
사라진다는 것. 거기에는 축구장 몇 개가 들어가고도 남을 만한
텅 빈 간격만 있을 뿐이라는 얘기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 주변을 구성하는 모든 형체의 본질이라는 것.
우리들은 텅 빈 공간을 걸어다니고 있다는 얘기다.
그러니까 붓다 사상의 핵심인 절대 공성이 지금 여기에서
우리들의 현실로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의미다.
한 편 재미있고 제법 그럴싸한 발상이라고 본다.
하지만 이것은 상상을 과학적 상식으로 바꾼 사고적 환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깨달음의 참된 내용과는 거리가 아주 멀다는 뜻이다. 별 과 별 사이만큼이나.
왜냐하면 붓다의 공 개념은 결코 그런 게 아니기 때문이다.
붓다가 말한 절대 공성은 본다는 것에 의한 보여 지는 세계의 어떤 상태가 아니라
보이는 것과 보고 있는 것의 관계가 서로를 속이는 기만으로서 그로부터 비롯된
모든 인간의 삶과 그 실상의 본질들이 텅 비어버렸다는 얘기인 까닭이다.
말하자면 근본적으로 완전히 다른 것이다.
그 비어있음이 아무것도 없다라는 것이 아닌 그 무엇도 아니라는 것.
사고에 의한 과학적 진리는 언제든 뒤집히고 전승될 수 있지만 사고 자체에 대한
명상의 진리는 불변으로 전승될 수 없다고 할까.
그럼에도 과학적 진리와 명상의 진리는 흥미롭게도 서로 닮은 구석이 있다.
사람들이 헷갈려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 첫 번 째는 바로 경험과 기억이라는 과거를 다루는 것이다.
인간의 앎이란 모두 관계에서 비롯되는 것이니까.
즉, 우리가 ‘안다’라고 했을 때 그것은 ‘경험했다’ 라는 말로써
태양은 뜨겁고, 물건은 아래로 떨어지며 얼음은 차갑다 등등의 일반적 앎들이란
모두 관계적 경험에서 온다는 말이다.
간단하게 끊어내면 경험을 통해서 사유의 소재를 얻고 그 것이
논리적으로 어긋나지 않게 실험적 계측과 수식적 합리성으로
정리 정돈하여 정교하게 증명시키는 방식이 바로 과학의 세계라는 말이다.
과학의 발전이란 경험과 기억에 끊임없이 가해지는 수정 보완인 셈이다.
어떤 것을 과학적 진리라고 말할 때 그것은 실존하는 어떤 조건의 현재 자체 보다는
이미 끝난 경험 상태를 과학적 방법으로 이해한 인간의 자기 인식 내지는 그런
설명적 사고 형태라고 말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 말은 생각하는 나 혹은 나의 경험과 객관적으로 독립된 그 어떤 것으로서의 과학적
대상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단 의미다. 과학이란 어떤 면에선 나를 과학적 지식으로
표현하는 하나의 수단일 뿐 그 어떤 실체의 사실 자체이거나 내용은 아니라는 것.
과학의 대상이 우주라고 할 때 그 과정 그러니까 나와 우주와의 간격은
절대 나의 경험 세계를 벗어날 수 없단 얘기다.
이렇게 볼 때 과학적 존재 인식은 인간의 경험 과정 내지는 그 형태를 과학적 언어로 조직하고
정밀한 논리적 타당성으로 설득하여 그 무엇으로 성립시키는 과정이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는단 말이다. 과학은 일관된 자기 존재 과정 혹은 그 경험에 대한
또 하나의 명칭일 뿐이라는 것.
물론 이렇게 반박할 수도 있다.
과학적 진리는 나의 현실 구성물로 존재하는 물질, 물리현상을 직접 관찰,
실험, 연구하여 증명된 실재적이고도 사실적인 현상의 내용이라고...
물론 그렇게 말 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무척 중요한 사실이 하나 빠져있다.
바로 과거이다. 우리가 말 할 수 있는 우주의 기본물질인 소립자에 대한 인식은
결국 경험의 본질에 대한 과학적 사고라는 얘기다.
과학적 사고가 항상 어제를 통하여 오늘을 만나고 있다는 사실이 그 방증이다.
끊임없는 자기 상대성 관계라는 것도 그 증거다.
이미 조건화된 관찰자와 관찰대상이라는 간격 사이를 배회하는 일종의
언어 집합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란 뜻이다.
이를테면 본질적 차원에서 봤을 때 하나의 앎(과거)이 서로 다른 이름들로 나뉘어져
과학이란 얼굴로 발현되고 있는 과거의 자기 구현 과정에 지나지 않는단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경험의 세계를 벗어날 수 없는 자기 분열의 반응이라는 것.
그러므로...
과학은 그 자신의 절대 배경인 과거의 도움 없이는 단 1mm의 그림자도 키울 수 없다.
이렇게 과학의 진정한 출발점은 과학자 자신을 형성하고 있는 기억과 경험이고
그런 자기정보를 대상으로 확대 재생산하는 부단한 사고의 분열 과정에 지나지
않는 것이기에 이른바 스스로를 위한 스스로에 의한 스스로의 자기기만적 상태인 것이다.
나와 내가 아닌 것의 관계 사이를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진자 운동으로써
과학자가 우주, 빅뱅, 은하단, 블랙홀 등등을 이야기 하며 거대
세계의 지식 내지는 의식 세계로 나아가는 것 같아도
그 실상은 한 인간의 자아를 형성하며 끊임없는 순간으로 생멸하는
과거 경험의 치열한 복제와 반복의 상황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에 반해 명상은 그 모든 내용의 진실과 위치가 정확히 드러난
있는 그대로의 상태로 일통된 종결적 시선이다. 관계에 대한
전체적이고 총체적인 이해의 객관성이라고 할까.
이것이 둘 사이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그렇다고 과학이 아무 쓸모 없다거나 엉터리라는 얘기는 아니다. 다만 과학이
그 원점인 나, 자아의 자기 분열 상태를 통찰하지 못하면 자신의 궁극적
초점인 ‘나는 무엇이며 어디로부터 오고 어디로 가는가’ 라는 물음의 올바른 답은
물론이고 그 질문의 진실 조차 결코 발견 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 까닭은 역사·전통·문화가 그렇듯이 인간의 자기 분리 과정을
무의식적 기계성으로 이끄는 역할로서의 사고가 과학의 유일한 몸통이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의 참된 삶과 진정한 행복이란 그런 과학의 놀라운 발견과 화려하고
고상한 지식의 총량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탓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