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삶이란 대부분 말의 환상 속에 있다는 사실을 잘 드러내는 예가 있다.
바로 선(禪)가의 수행자들이 내던지는 촌철살인의 역설(逆說)이 그것이다.
‘… 동쪽 산이 물 위로 간다.’ (승려 운문)
‘… 센 물살 위에서 공을 찬다.’ (승려 조주)
‘… 색즉시공 공즉시색.’ (승려 구마라집)
물론 이 글을 읽는 저마다의 조건에 따라 그 해석은 각양각색일 게 틀림없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지루한 일상을 토막 내 그 관성의 껍데기를 파호치는
본 예시 문의 날카로운 지향점이 다름 아닌 우리 삶의 숨겨진 이면을 뒤집는
변화라는 덴 이견이 없을 것이다.
그들의 언어는 듣는 대상보다 보아야 하는 소리에 더 가깝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옛 시인의 노래를 들어보자.
참 기묘하여라 참 기묘해
무정의 설법은 알기 어렵네
귀를 빌리면 더욱더 어렵고
눈이어야 비로소 이해가 되니
也大奇也大奇 無情說法不思議
若將耳聽終難會 眼處聞聲方得知
(승려 동산)
그러면 이처럼 기발한 언어를 내뱉고 한바탕 웃어젖혔을 그들의 진심은 과연
무엇일까? 나는 까마득한 시공을 넘어 오늘날까지도 생생한 입 냄새를 확확
풍겨내는 실로 경탄스런 그 괴력의 역동성을 인간의 보편적 상태인 각자의 무명에서
찾고 싶다. 우리라는 생존 관계의 거짓된 분리감이 그 핵심이란 말이다.
명상 세계에서 가장 흔하게 듣는 깨달음이란 실재하는 그 어떤 것을 변화시키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마치 꿈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하염없이 되풀이되는 언어 차이의
상대성이 만든 속임수를 알아차리는 순간을 이르는 것라는 것.
우리들의 일상은 내 것과 내 것이 아닌 것으로 분열 충돌하는 사고 과정의
자기 상대성 관계들이 삼키거나 뱉어내는 경험의 끝없는 언어 분열과 재배열일
뿐이란 말이겠다. 사고의 허탄한 지껄임이다.
‘… 바다 밑 제비집에 사슴이 알을 낳고… 무쇠 소가 달을
물고 달아나듯이…’ (승려 효봉, 동산)
다시 말해 옛 선승들의 촌철살인적 절구들은 공수래공수거로 생각 한번 쓱 바뀌면
아무것도 아닌 삶의 여반장(如反掌) 상태를 독특한 시각으로 표현한 돈오돈수의 백미라는 것.
하지만 이처럼 완벽한 천의무봉 같은 그들의 일갈에도 아쉬운 점은 있다. 인간에게 있어서
삶이란 거의 대다수에게 무조건 적으로 견뎌야 하는 결코 거절할 수 없는 절대 과정의
한 내용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그 견고한 기계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간과되었
다는 것이다.
사람이면 그 누구도 비켜갈 수 없는 인류 공통의 자기 무지를 각자의 시간에 기반한 개인
과정의 사고와 암기된 언어의 기만성으로 충분히 풀어낼 수 있고 그것으로 끝이라는 암묵적
동의는 빗나갔다는 얘기다. 왜냐하면 그것은 마치 지극히 국소적이고 표피적인 상처의 치료 법을
모든 병증을 완치하는 기준으로 호도하려는 수간과 같기 때문이다. 경험의 본질을 특정 인식의
변화에 따른 무상한 기억의 혼돈 속에만 고착시키는 아쉬움이 크다고 할까.
그러므로 만약 인간들의 총체적 자기 무지가 오늘날의 존재 경험 속에서 드러나고 있는
절대 타성을 은폐하기 위한 매우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움직이는 기계적 시스템에 의한
설정의 영역임을 알아차린다면 그들의 얘기는 완전히 달랐을 것이란 게 나의 견해다.
자신들이 반드시 혁파해야 할 대상이나 현상으로 폐기해버린 상식적 삶의 무상함 자체가
그들이 일평생 환원되기를 원했던 있는 그대로의 또 다른 형태임을 이해했을 테니까 말이다.
즉, 깨달음이란 전체로의 깨어남 보다 참된 스스로성을 창조하는 역동적 진리로의
발현이란 걸 알았을 것이란 얘기다.
해서, 나의 주장은 대립적인 언어 감성을 비틀어 붉은 인주의 찌꺼기 같은 전승적 묵은 때를
인식 갈피에 도장처럼 찍어 낼 뿐인 이런 역설들의 앙증맞은 무의미성과 그 속에서
번뜩이는 과거의 절대 금속성을 파악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통찰이라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