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 단상

패착

조각별 2022. 11. 16. 19:33

종이 문자에서 디지털 기호로 급변하는 열악한 생태 환경 속에서도

출판계는 여전히 질 좋은 책을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매일 같이 쏟아져 나오는 신간들의 알싸한 잉크 냄새로 베어든

그들의 진한 땀방울들이 언제나 눈부시게 빛나길 희망한다.

 

그런데 일반인을 대상으로 간행되는 명상 관련 도서를 소개하거나

정독한 다수의 문장들을 대할 때면 반가움보단 아쉽고 안타까운

마음이 더 크다. 몇몇을 제외하곤 깊은 통찰로 활짝 핀 수승한

의식의 길이 아닌 상업적 수단과 그 이익의 극대화를 위해 잘 가공된

문장들의 소란에 훨씬 가깝기 때문이다.

 

단적인 예로 거의 모든 저작물에서 공통의 관심사로 언급되는 지금

여기에 대한 인식을 살펴보면 더욱 그렇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경쟁과 차별, 학연 지연 등 계층 간 폭력으로 얼룩진 사회적 생존

관계의 상실과 분노를 치유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라고. 상처와

고통, 백일몽 속에 갇혀 과거와 미래로 연소되는 생명 에너지를

속이 꽉 찬 현실로 회복시키는 만병통치약은 바로 지금 이 순간뿐이라고

말이다. 그러면서 있는 그대로의 순수 형태인 그런 존재 현상으로서

스스로를 발견, 지속하는 게 매우 중요하며 그것을 가능케 하는

삶의 시작점이 바로 과거와 미래 사이의 사고가 아닌 지금 여기로서의

의식 상태라고 말한다.

 

하지만 알다시피 국가 역사 문화 민족의 구성원인 우리 대부분은 철저히

관계적 존재들이다. 공동체의 가치 사슬로 그 위치와 역할이 정의되고 자기 존재

의미와 목적이 규정되기 때문이다. 이미 시작과 끝이 결정되어버린 한 편의 영화 같은

삶이라는 것이다. , 설명된 것만 있을 뿐인 스스로에 대해 스스로의 인식은 전혀 없는

완벽한 타성 세계로 도배된 자기 무지 상태의 현실이란 말이다. 배워진 지식으로 자기

진실은폐된 왜곡의 현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

 

그렇다면 주어진 조건의 일체가 혼돈과 무질서일 뿐인 이런 상황에서

마치 먼지 속 티끌의 가치를 따지는 것만큼이나 무모한 지금 여기와

그렇지 않은 것의 분별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도리어 명상 도서 저자들의 얕은 자기 이해만 대명천하에 드러내는 추태가

아닐는지... 자신들도 미쳐 예견하지 못한 한심스러운 실수란 얘기다. 스스로가

과거 현재 미래라는 과거 경험들로 완곡하게 분열되어 있는 상태를 이식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그래서 독자가 자기 꿈속의 타인과 같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알아보지 못하는 자기 무지적 고백인 것이다.

 

때문에 평범한 우리들이 만나는 그들의 지금 여기는 당연하게 그 옛날

봉이 김선달이 팔아먹은 대동강 물처럼 그들 스스로를 모욕하는 허물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들이 건넨 지금 여기의 한순간이란 대체로 오래된 기억에

의존되어 있거나 아주 낡은 사고의 습성을 껍데기처럼 둘러쓰고 있는 경험의

경험에 의한 경험의 한 조각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본질적 측면에서 봤을 때 상식적인 지금 여기의 진실은 스스로를

속이는 기만적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겠다. 자기 진실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지금 이 순간은 그저 변형된 자기 무지의 한 내용 외에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다시 말해 앞에서 잠깐 열거한 국가 역사 민족 문화의 경험들로 가득한

과거의 끝없는 자기 복제와 반복 그 배열의 한 형태에 지나지 않다는 것이다.

 

가령, 고구려 왕의 지금 여기와 백제 왕의 지금 여기, 그리고 우리들의

지금 여기는 완벽하게 동일하지만 그 까닭은 그것이 객관적인 시대적 지점이

아닌 분열적인 세대적 찰나에 해당하기 때문이란 뜻이다. 자연 상태로의 경계보다

(인식)과 말(개념)의 관계로 변화하는 사회적 간극으로서의 현상일 뿐이란 의미다.

장소가 아닌 시점이고 위치가 아닌 차이의 형태라는 것. 한마디로 이성적 언어로

논의되는 지금 여기와 우리들의 기억 혹은 그 기억을 내용으로 한 나는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말이다. 이것이 진리적 사실이라는 것.

 

따라서 명상 도서 저자들이 말하는 모두에게 동일하거나 똑같이 적용되는

자연 상태로서의 지금 여기와 그런 순간으로의 한때는 과거 정보들이 명칭만 바꾼

기억 나부랭이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스스로에 대해 무지한 행위가 선택하게 되는

완전히 빗나간 패착이라고 할까. 거울 속 풍경 사이로 숨어드려는 어리석음이라고 할까.

 

그런 이유로 연습이 필요한 명상은 매번 의식적 리셋이 요구되는 것이다.

거울 면을 열심히 닦으면 거기에 비친 풍경도 깨끗해지리라는 착각을 바탕으로

하는 탓이다. 만일 우리가 자기 무지인 채로 일생을 마친다면 그들이 말한 지금 여기는

불변의 순간으로 영원히 속여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당장 필요한 건 지금 여기의 한순간이 아니다. 조작된 그

언어의 갈피로 끌려 들어가 끝없이 반복되는 기계적 과정으로 소모되는 것보단

오히려 그렇게 길들여진 상대성 의식을 깨뜨리는 것이다. 그 관성 속에 숨겨진 채

불변 불멸의 본질적 내용으로 반짝거리는 전통 인식과 그 절대적 타성을 걷어내는

것이라는 얘기다. 물론 어려운 일이겠지만...

 

그러니까 적어도 생명의 현재성으로 살아있기 위해 스스로를 성찰해야 한다면 우리들의

날카로운 초점은 반드시 자신을 불평, 후회, 자책으로 오염시키며 끊임없는 수축과

팽창으로 증발하려는 과거의 어느 흔적에서 스스로를 털어내는 게 아니라는 얘기다.

또는 걱정과 두려움, 미친 상상력으로 스스로를 탕진하는 미래의 한끝을 구부려서

정밀하게 가공된 지식의 틈새를 벌려 한때의 생명 에너지로 흘려 넣는 게 아니란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의 진실을 모른다고 할 때 과거 현재 미래, 꿈과 꿈꾸는 자, 경험과

그 대상은 하나같이 혼란스럽고 무질서한 동일한 어둠 속 내용물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도굴당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보통 사람들을 대상으로 도둑질한 경험

쪼가리를 지금 여기라는 몇 개의 낱말로 손질해서 도굴당한 이들에게 되팔아먹는

명상 도서 저자들이 하는 짓거리는 뻔하다.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마저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도록 자기 경험의 상대성 관계로 잔혹하게 얽어매는 어마무시한

파괴적 행위일 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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