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 단상

경계를 넘어서

조각별 2023. 5. 9. 19:49

 

 

 

 

삶은 관계의 다양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중에서도

자연과 인간의 오랜 교감은 오늘날 안락하고 편리한 문명 생활을

형성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으리라 본다. 수많은 역사 속

사건은 물론 험난한 물리적 변화 과정을 통해 체득한 생존 경험을

특별 가공하여 대대로 기억, 강화 시키려는 교육적 학습이 끈질기게

이어지고 있는 까닭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솔직히 이런 세습적 사고방식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다.

너와 나를 한 사회의 생활 규법 속에 억압하는 카테고리성 세계관은

트라우마처럼 작용하는 거대 공포와 아픔이 도사리고 있다고 보는

탓이다.

 

압도적인 힘에 의해 가공 정제된 왜곡이 무의식적으로 혹독하게

가스라이팅 된 존재 의식이라고 할까. 예로서 한국 사람인 나는 문화,

전통적으로 몇몇 특정 대상(국가. 집단)에 대해 어쩔 수 없는 배타적

습성과 적대적 혐오감으로 길들어진다. 한국 사람인 나에게 인간다운

양심은 그들을 응징해야 할 때 서슴없이 나서야 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나의 독특한 상대성 인식에 따른 심리적 압박과 떳떳함이 과연 자연

회귀 본능이라고 일컫는 우주 만물과의 일체적 통합 상태로서의 어떤

동질적 공명 내지는 감흥과 완벽하게 다를 수 있을까?

 

오염되지 않은 자연 조건이거나 의도치 않은 환경의 놀라운 현상 속에서

맞닥뜨리는 뜨거운 감동과 소름 돋는 전율... 그 복잡하고 극적인 충격을

통해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현실의 마비가 촉발한 초월성 환희와 연결적

평온함 등등... 그것이 생사를 넘나드는 나의 애국적 행위 감각과 전적으로

다른 것인가라는 얘기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인간의 자연성 회복을 들먹이며

현대 사회의 고독과 절망들이 관계의 분절에 따른 결핍과 저항의 내상이라고

말하는 건 언어도단이라 하겠다. 우리가 겪는 다사다난한 사회현상 내지

인과 관계란 이미 주어진 조건의 절대 영역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것들이니까.

 

나는 나다의 내가 그 자신의 고유성이 부정된 비정상적 상황일 때

지금 여기의 혼란은 전적으로 무질서가 아니며 그 폭력 형태 역시

누구의 책임도 아니란 뜻이다. 별별 조건에 있든 우리가 스스로에

대해 무지하다면 지금까지 너무 당연하고 마땅하게 요구되어 온

일상적 내용들도 그 가치에 상관없이 이미 주어진 조건 자체의

자기 구현을 위한 기계적 현상 외에 아무것도 아니란 뜻이다.

 

자기 진실을 중심으로 한 객관적 정당성이 담보될 수 없는 존재

과정은 한낱 경험의 경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의미다.

보통의 우리가 과거로만 살 수밖에 없는 연유가 아닐까. 그럼에도

만약 그렇게 느끼고 있다면 분명 속여졌거나 거짓된 것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절대 타성의 무자비한 기망이란 얘기다. 왜냐하면

우리가 자기 어둠 속에 있다는 건 자신은 물론 그 어떤 것도 제대로

분별 식별할 수 있는 정확한 시선을 상실했다는 의미가 되니까.

내 스스로가 어디에 있는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어떻게 자기도 아닌

것들에 대해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설령 그것이 가능하다

할지라도 그 이해 속에서 자신을 찾는다는 건 지독한 어불성설일 뿐이다.

 

이 말을 뒤집으면 우리들의 매 순간은 재활용의 부역적 삶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완곡한 타성적 세상 가치들에서 우리가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일 뿐이란 뜻이다. 이제껏 있는

그대로의 절대 질서로서 너무 일방향으로 강압된 가스라이팅적

삶의 내용 속에 왜곡 훼손된 나는 나다의 자기 진실을 각자의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것이다. 스스로에 의한 자기 발견이야 말로

인류를 지금 여기의 한순간에 묶어 놓은 절대 무명의 공통성을

풀어헤치는 열쇠가 되는 탓이다. , 깨달음이란 던져진 자신을

텅텅 빈 무명의 자기 부재로 해체시키는 자발성으로 인간의 참된

스스로성 세계를 활짝 여는 창조적 시발점이 되는 까닭이다.

 

 

인간 의식 세계로 변환되어 한 사람의 생각과 말과 행위로 실현되는

일체 환경의 가스라이팅적 사실을 이해하기 시작할 때 우리 생명의

찰나는 마침내 진리로 깨어나는 것이다. 맹렬한 소리를 내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대성 대립의 장치적 소란을 무장

해제시키는 혁명적 에너지로 발화한다고 할까. 그때 비로소 유식과

무식, 부분과 전체, 육과 영의 차이로 갈라졌던 우리들의 모든 시공간은

움켜쥔 서로 다른 일체 어둠의 지평을 팽개치고 자기 창조의 눈부신

세계를 향해 첫걸음을 내딛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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