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182

투영

최선의 가치를 위하여 얼마나 많은 차선과 열외의 기다림이 잊혀지고 사라지는가 수많은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들 사이에서 불특정 순간들은 언제나 한 장의 메모지로 소리 없이 뜯겨지네 뜨거운 중심을 관통하는 팽팽한 순서로 잡아당겨지며 무엇이 아닌 것에서 그 무엇을 향한 끝없는 축적의 운동들 오늘도 우린 중첩된 투영으로 타오르는 환한 에너지......

마음의 무늬 2023.06.09

모퉁이 바람

감자들이 포동포동 살찌는 계절이다. 어느 곳에선 벌써 수확의 기쁨이 전해져 온다. 아무래도 감자 캐는 즐거움은 다른 뿌리채소들이 결코 따라올 수 없는 그 특유의 손맛 때문일 것이다. 우리 집은 밭이 넉넉하지 못했다. 언제나 보리, 마늘 등 다른 작물이 심어지고 남은 자투리땅에 셋방 살이 하듯 감자밭을 일구었다. 그래도 짧고 굵은 고랑마다 튼실하게 자란 줄기가 넘쳐나는 야무진 수확 철이 되면 우리 식구들은 너도나도 신명이 났다. 주렁주렁 딸려 나오는 알알에 덩실덩실 흥겨웠다. 커다란 아버지 지게에 얹힌 뽀얀 녀석들이 우루루 우루루 마루 밑으로 기어들면 우리들의 입술은 그야말로 활짝 핀 접시꽃처럼 날마다 하하 호호였다. 내 어릴 적 우리 집 마루는 참 높았다. 주먹만 한 나무 공이가 뻥 뚫려 자칫 발목이라도..

푸른빛이 아픈 날

푸르게 부어오른 산마다 굽은 등 비탈 아려서일까 보고 싶다 노래를 불러 보네 비 나리는 고모령 비 나리는 고모령 어느 해 정초 지금은 웰빙 편백 줄 서는 마을 옆 옹색한 비녀 등 넘어 상경할 때 퍽퍽퍽 함박눈 속 에이듯 작아지는 소년 아들 돌아보고 또 돌아보면 시린 손 흔드느라 솜사탕처럼 서 있던 사람 홑겹 버선 발 발가락이 새빨갛던 내 어머니 한 줌 재로 남은 그 미소 가여워 못내 가여워서 푸르고 푸른 바람 속 햇살처럼 눈부시다 마음 온통 그리움으로......

마음의 무늬 2023.05.23

흔한 날의 잰걸음

우리 마을의 봄은 가벼운 알레르기 증상으로 끝나지 않는다. 한 시절 내내 온갖 바람들 시끄럽기 때문이다. 자고 나면 딴 세상인 북새통에서 그나마 나은 건 지난 겨울 끝자락의 시린 하늘 일찌감치 여린 꽃잎에 아로새긴 매실나무 살림살이다. 외톨이 참새 뒤쫓아 부리나케 숨어든 가치 몇 마리쯤 빈손으로 쫓아버리기에 충분하니까. 바야흐로 꽃향기 따라 발호하는 대자연의 원초적 본능 굽이치는 도랑에 서서 언제봐도 도통 속내를 알 수 없을 만큼 우직하게 버티고 있던 무화과나무까지 마침내 방물장수처럼 나날이 천변만화하는 요지경 마을. 모른 척 나만 혼자 초지일관 수불석권한다는 것은 왠지 시류의 보편성을 거스르는 몰지각한 풍류의 도라 여겨졌다. 꼭꼭 닫아걸었던 독서 삼매경을 풀어헤친 것이다. 기왕에 붓을 잡았으니 문밖을 ..

소소 단상 2023.05.13